2009년 11월 18일 수요일

세운 상가에 대하여..

1966년 6월 20일 김현옥 전 서울시장은 중구청의 6급 공무원인 이을삼씨가 낸 아이디어를 가지고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다. 이날 보고 내용은 종묘 건너편에서 시작해 청계천로, 을지로, 퇴계로를 가로질러 형성된 종로~필동간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고 이곳에 민간자본을 유치해 첨단 건물을 짓는다는 것이었다. 빈민들이 우후죽순으로 몰려 살았던 이곳은 일제시대 때는 소이탄(불을 질러 인명과 재산에 피해를 주는 폭탄) 투하에 대비해 공터로 남겨 놓았던 소개지였다. 이 계획에 대해 박 대통령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에 고무된 김 시장은 곧 바로 이곳에 살고 있던 수천명의 빈민들을 서울 외곽으로 몰아내고 건축 설계에 들어간다. 여기에 참여했던 건축가는 당시 정치권과 두터운 인맥을 바탕으로 굵직한 사업을 전담했던 김수근씨와 그가 부사장으로 있었던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다.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도시계획 부장이었던 윤승증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1966년 어느날 시장, 부시장에게 신용을 갖고 있었던 김수근 선생에게 시장이 문제의 땅(세운상가 터)의 이용방법을 물어 왔을 때 즉석에서 보행자몰, 보행자데크, 입체도시 등의 개념을 설명하고 공감을 얻었다.(중략) 이 구상을 구체적인 그림으로 만들어 내는 일이 필자에게 명해졌고 최초의 스케치를 만들어야 하는 시간은 단 몇칠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윤승증 ‘건축’ 1994년 7월호 ‘세운상가이야기’, 손정목 ‘국토’ 1997년 6월호 ‘서울도시계획이야기14’> 이런 과정을 거쳐 처음 설계된 세운상가는 시대를 뛰어넘는 개념과 기술이 적용됐다. 건물과 건물을 2층이나 3층에서 연결하는 공중 보행 데크를 비롯해 5층에 인공대지를 설정해 공중정원을 만든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 높이 올라가면서 층을 계단식으로 후퇴하게 해 바람과 햇빛을 잘 들게 하는 구조를 적용하고 지상 1층을 자동차 전용 공간으로 할애한다 개념도 당시에는 ‘혁신’이었다. 그렇지만 그 시대는 이를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구상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대부분 실현되지 못한다. 건설 과정에서는 최초 설계를 주도했던 서울시가 뒤로 빠지고 민간업체들이 사업을 전담했기 때문이다. 민간 사업자들은 도시 경관이나 첨단 건축 기술 보다는 분양과 임대 수익을 올려는 것이 목표였고 그러다 보니 최초 이상적인 설계는 무시됐다.
이에 대해 손정목 전 시립대 교수는 ‘서울 도시계획이야기, 아 세운상가여, 재개발이라는 이름의 도시파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세운상가는 현대와 대림, 삼풍, 풍전, 신성, 진양 등 6개 기업과 아세아상가번영회, 청계상가(주)를 합쳐 8개 업차가 분할, 시공하기로 결정됐다.(중략) 1968년 들면서 대림, 청계, 삼풍, 풍전, 신성, 진양 등 상가아파트와 호텔이 하나씩 준공됐다.(중략) 이 건물군은 (도도한 기업 논리에 의해) 당초의 구상과 전혀 다른 매우 추악한 모습으로 실현된 것이다.” 결국 첨단 건축 기술의 전시장이 될 뻔한 세운상가는 각각의 주상복합이나 호텔로 건립됐다. 종로~퇴계로 사이에 현대상가(13층), 세운가동상가(8층), 청계상가(8층), 대림상가(12층), 삼풍(14층), 풍전호텔(10층), 신성상가(10층), 진양상가(17층)가 특징없는 모양으로 들어섰다. 총 연면적은 20만6025㎡, 최대 864세대가 거주하는 주상복합타운이 됐다. 세운상가가 건설될 무렵 언론들은 철근 7000t과 시멘트 87만부대 등 엄청난 자재를 사용해 만든 동양 최대 건축물이라는 찬사를 쏟아냈다. 1966년 8월 세운상가 프로젝트의 첫 사업인 아세아번영회 기공식에서 김현옥 시장이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휘호를 써 ‘세운’이라는 이름을 붙었다. 하지만 최초의 이 주상복합타운은 나중에 볼품없는 외관으로 서울 도심의 경관을 헤치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지목된다. 세운상가는 준공 이후 7~8년간 서울의 명소로, 또 영화배우와 정치인 등 거물급들이 거주하는 고급 아파트로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강남 아파트가 개발되고 도심에 롯데와 신세계 등 최신 백화점과 용산전자상가 등이 조성되면서 슬럼화되고 말았다.

1970년말부터 세운상가는 일반 의류와 정상 제품 외에도 각종 싸구려 모조품과 해적판 레코드, 도색 잡지 등을 파는 음침한 장소로 악명이 높았다. 이에 따라 도심을 살리기 위해 세운상가를 하루 빨리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오랜 검토 끝에 서울시는 종묘와 남산을 잇는 녹지축 조성을 위해 세운상가를 없애기로 결정했다. 세운재정비촉진사업의 하나인 세운녹지축 조성 작업에 근거해 2008년말 현대상가를 시작으로 8개 건물은 하나씩 해체될 운명에 놓여있다. 세운녹지축 건설 사업은 오는 2015년까지 계속된다. 이 사업이 끝나면 일제시대 소이탄 피해를 막는 소개지에서 전후(戰後) 빈민들의 불안한 삶의 터전으로, 그리고 경제개발시대를 대표하는 도심 랜드마크 건물이었던 세운상가와 그 일대는 서울 시민을 위한 녹지 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것으로 보인다.

2009.6.29 매일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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